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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지정학 vs. 민주주의” 그리고 평화학의 위기 – 이정철 부원장

뉴스레터/칼럼  칼럼  2023.04.28

“지정학 vs. 민주주의” 그리고 평화학의 위기

이정철

통일평화연구원 부원장

 

불안과 공포가 국민의 일상을 점령하고 있다. 단기전으로 끝날 것 같던 우크라이나 전쟁은 1년을 넘어서 지속되고 있고, 북한의 도발은 질ㆍ양적으로 도를 더해가고 있다.

이런 현상을 지정학적 대변동과 지각변동에 수반되는 이행기적 마찰로 치부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머지의 부상(the rise of the rest)’이라 일컬어지는 이런 류의 지정학에 부화뇌동하지 말라며, 자유주의 국제주의자들은 민주주의와 가치 연대를 강조하는 결연한 동맹으로 체스판의 장군놀이를 거부하고 있다.

이유야 무엇이 되었든 안과 밖에서, 위와 아래에서 그리고 강성 연성을 가리지 않고 동시에 몰아치는 이 위기의 한 중앙에 서 있는 한반도는 당혹스럽다. 오랫동안 안보는 미국과, 경제는 중국과 같이한다는 ‘안미경중’의 길을 걸어온 우리로서는 미-중 경쟁과 공급망 분리라는 초유의 사태에 갈 길을 잃고 있다. 동맹이 강조하는 민주주의와 가치 연대는 소중하지만 다가오는 경제 위기의 경고등 앞에 넋 놓고 있기도 쉽지 않다.

동맹은 어떠한가?
중산층을 위한 민주주의라는 범상치 않은 구호를 들고나온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의 MAGA(Make America Great Again)에 버금가는 미국 중심주의에 더해, 안보는 가치요 경제는 미국이라는 새로운 등식을 내밀고 있다. 반도체도 배터리도 자동차도 모두 그 대상이다.

이웃 일본은 한국 정부의 화해 손짓에도 불구하고 전략적 가치가 떨어진 한반도에 변화를 줄 조짐이 없다. 미중 갈등기와 인-태 프레임의 시대에 대만 유사(有事·전쟁이나 사변 등의 비상사태)는 일본 유사라지만, 한반도는 전략적 요충지가 아니라는 점을 확인하고 있다. ‘물잔 반 잔 채우기’는 한국 정치의 기대치일 따름이고, 한일 화해는 한국이 만든 비정상을 스스로 정상으로 되돌린 것일 따름이라는 아베식 냉소만 메아리치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이라는 희대의 패악질이 가져온 갈등이 해소되지 않는 한, 민주주의 동맹이 연대를 후퇴할 가능성은 전무하다. 군사적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민주주의를 확산시킨다던 네오콘식 이상 때문은 아니지만, 아프칸 철군으로 철퇴를 맞은 바이든 행정부가 쉽사리 타협의 길로 가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중국-러시아, 중국-독일, 중국-프랑스, 중국-브라질로 이어지는 연쇄 회동은 새로운 지정학에 대한 환상을 만들어 내는 듯하다. 그 끝이 어디로 이어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대안적 세계로의 가능성을 외치는 자들이 주는 희망 고문 또한 고통이긴 마찬가지다.

항상 먹고사는 문제와 민주주의라는 고귀함 사이에서 고민해왔던 민초들에게 이런 상황 전개는 마음 졸이게 하는 현실일 따름이다.

한반도의 위기는 이처럼 차고 넘치는데 동맹 해법은 보이지 않는다.이명박 정부처럼‘무조건 동맹’이라고 외치기엔 동맹이 우리에게 보장해 줄 선물 보따리가 넉넉해 보이진 않는다. 일본은 대놓고 한국을 애치슨 라인 밖으로 내몰고 있다. 한미일 동맹으로 평화를 보장한다고 내걸기엔 3개국 내부가 너무 복잡하다는 뜻이다.

동시에 ‘힘에 의한 평화’라는 대북 억지도 그 효과는 요원해 보인다. 북한의 도발은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탐지 능력을 앞지르는 기술적 성취도가 예상을 뛰어넘는다. 오랜 전통이 된 북한 무시(negligence) 전략의 효용성이 다하다 못해 매우 위험한 접근법이라는 의문부호가 제기되는 이유이다.

‘힘에 의한 평화’가 안보딜레마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그것은 군비경쟁의 다른 이름이다. 문재인 정부가 착각했던 ‘선의의’ 군비경쟁이란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다. 비대칭 동맹의 힘을 통한 평화는 항상 방기와 연루라는 ‘동맹의 안보딜레마’에도 시달려야 한다. 버려지는 두려움 때문에 대만에도 가야하고 우크라이나에도 가야 하는 연루의 과잉이라면 그런 평화는 불안정한 평화이다.

평화를 위해서는 전쟁을 준비하라던 베게티우스의 “파라 벨룸(Para Bellum)”은 위협 무기에서 사용 무기로 핵이 전환된 제3의 핵 시대에 적절한 구호가 아니다. 불사(不死)가 각본상 보장된 영화상의 히어로 키아누 리브스에게나 가능한 모토이다. 우리가 핵을 갖는다고 해서 그 각본이 보장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에게 미래는 묻는다. 평화를 위해서 진정 평화를 준비하고 있는가? 인내하고 또 인내하고 평화에 투자하고 있는가? 평화배담금(peace dividend)을 향유 하기까지 그 눈물의 계곡을 건널 준비가 되어 있는가? 국민을 위한 평화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다.

 

 

통일평화연구원 부원장 이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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