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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칼럼: 새로운 산책로를 열며 – 박명규 소장

뉴스레터/칼럼  칼럼  2006.09.15

 

새로운 산책로를 열며

박명규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소장

 

 

 

근거는 없으나 나는 지식인에게 어울리는 행동 가운데 하나가 산책이라는 느낌을 갖고 있다. 부지런히 뛰는 모습이 현대인의 일반적 이미지이고 또 그런 젊은이를 키워내려는 압력이 곳곳에서 작동하지만 아무래도 뜀박질보다는 조용한 산책이 지성인답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산책로는 대학의 캠퍼스에 매우 어울리는 공간이다. 그 길에 역사의 무게와 지나간 경험들에 근거한 이야기들이 오래된 이끼처럼 깔려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음은 물론이다.

관악캠퍼스에도 산책할만한 곳이 없진 않다. 조금만 벗어나면 접할 수 있는 관악산으로의 등산로는 그 자체로 일품이지만 건물사이에 숨겨져 있는 꽤 운치 있는 산책코스들도 여기저기 존재한다. 최근 새로 지어진 미술관에서 통일연구소가 있는 문화관까지의 ‘걷고 싶은 길’도 인위적인 냄새가 많긴 하지만 그런 길의 하나로 꼽을 만하다. 하지만 대학의 분위기는 점점 더 산책의 정서로부터 멀어지고 60년을 맞는 대학에 걸맞는 다양한 이야기들의 무게감으로 걷는이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산책로는 찾아보기 어려워 아쉬움이 크다.

 

오늘 관악에 새로운 산책로 하나를 연다. ‘관악통일산책’이라 이름 붙인 이 길은 그러나 몸으로 걷는 산책길이 아니라 머리와 마음으로 즐기는 산책길이다. 이 산책은 인터넷의 도움을 받아 연구실에 앉아서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가만 있어도 찾아와 모셔가는 21세기형 소요이다. 산책은 원래 느린 속도감과 여유로움을 생명으로 하는 것이니 스피드를 자랑으로 삼는 컴퓨터라는 매체와 결합시키려는 시도가 어색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인터넷 덕택에 ‘새로운 유목사회’가 가능해질 것이라는 사회학자들의 예측도 있음을 생각하면 그다지 터무니없는 구상은 아닐 듯싶다. 실제로 ‘서핑’이란 ‘산책’과 매우 잘 어울리는 행동이기도 하다.

 

이 산책로를 오가는 사람들은 공통의 화두를 하나 지니고 있다. ‘통일’이라는 말이 그것인데, 정작 호젓하게 즐기려는 산책길에 꼭 그런 화두가 필요하냐는 반문이 있을 법하다. 필요하더라도 하필 정치적 논란이나 소란한 이데올로기 냄새마저 풍기는 그런 단어를 선정했느냐는 불만은 충분히 가능하겠다. 하지만 곰곰 생각하면 산책의 진정한 묘미는 무거운 주제를 여유롭게, 긴 호흡으로, 관조하면서 사유할 수 있다는 데 있지 않을까. 통일과 같이 중요하지만 거북하고, 낯익지만 정겹지 않은 숙제를 푸는데 산책로에서의 대화와 사색이 주는 힘은 매우 중요하리라 본다. 통일에 대한 개인적 생각들, 일상적 경험 속에서 발견되는 지혜들, 타인과 함께 공유하고픈 경험들, 깊은 이론적 성찰과 견해들을 산책로 주변에 걸어놓고 오가는 사람들이 여유롭게 보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 – 그 결과는 매우 클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환경이 유동적이고 남북관계 역시 불안정한 상황에서 전례없이 우리 사회의 종합적 판단력과 역사적 예지가 중요해지고 있다. 섬세한 상황인식과 분석력이 앞으로 더욱 필요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미래를 꿈꾸고 이를 실현해내려는 상상력과 긴호흡이 필요한데 이것은 뜀박질하는 자보다 산책하는 자들의 몫이 아닐까 싶다. 관악에 걷고 싶은 산책로가 늘어나고 나날이 풍부해지는 이야기가 덧붙여지기를 기대하면서, 싸이버 상의 새로운 산책로가 북한, 남북관계, 통일 등과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의 창출과 소통에 중요한 통로가 되기를 기대한다. 비록 눈으로 보고 발로 걷는 길은 아니지만 통일을 향한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잠재되어 있는 열정을 깨우치며 참신한 지성을 북돋우는 컨텐츠들이 길가에 주렁 주렁 열려있는 상큼한 산책로가 되기를 기대한다.

 

 

 

 

 

 

 

 

박명규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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