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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칼럼: 태극기 단상 – 김상환 교수

뉴스레터/칼럼  칼럼  2007.02.05

 

태극기 단상

김상환

서울대 철학과 교수

 

 

몇 주 전부터 주역(周易)을 다시 읽는다. 서양 존재론을 뒤쫓다가 불현듯 동양의 존재론이 궁금하여 오래 전에 펼치기 시작했다. 이 책은 세상만물의 변화를 64괘의 형상을 통해 설명하고 있는데, 거듭 읽어도 그 끝을 알 수 없어 시간이 있을 때마다 다시 읽는다. 재차 읽어도 새로운 맛이 있으니 많은 사람이 여기에 빠져 평생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이런 신기한 사고-유희의 장난감이 있다는 것은 동양에서 철학하는 사람의 복이라 할 수 있다.

 

이승만 정권 시절 우리나라의 분단 상황을 태극기에 비유하여 유명해진 객담(客談)이 있다. 태극문(太極紋)이 붉은색과 푸른색으로 나뉜 것처럼 우리나라가 두 가지 색깔의 이념으로 나뉘어 있으므로 태극기를 만든 사람은 해방 이후의 분단 상황을 예견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태극기에는 태극문 이외에도 주역에 나오는 하늘(111), 땅(000), 불(101), 물(010)의 괘가 있다. 물론 여전히 객담의 수준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이 괘상(卦象)들 역시 우리나라의 험난한 현대사를 예언한다고 할 수 있다.

 

하늘(111)이 위에 있고 땅(000)이 아래에 있는 괘(111000)는 천지비(天地否) 괘라 불린다. 여기서 비(否)란 막혀 있다는 뜻이다. 음(0)과 양(1)이 따로 놀면서 조화를 이루지 못하여 모든 것이 막히고 통하지 못하는 형상이다. 불(101)이 위에 있고 물(010)이 아래에 놓이는 괘(101010)는 화수미제(火水未濟) 괘라 불린다. 여기서 미제란 물을 건너지 못했고, 그래서 아직 이루거나 만들지 못했다는 뜻이다. 음과 양이 교대하여 가지런하게 보이지만 음 자리에 양이, 양 자리에 음이 있어 6효 모두 잘못된 자리에 놓이면서 도처에 상극 관계가 펼쳐지는 형상이다. 태극기를 순서대로 그리면 태극문 다음에 천-지, 화-수의 방향으로 그리게 되고, 따라서 이 두 가지 부조화의 괘를 그리는 셈이다.

 

사실 한국의 현대사는 수많은 갈등과 대립에 의해 얼룩져 있다. 가장 커다랗게 보이는 대립은 남북 대립이지만, 이 남북 대립은 이데올로기 대립에서 왔고, 이데올로기 대립은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귀결이니 동서의 대립에서 온 것이다. 한국은 동서의 대립을 극복하지 못하여 이데올로기 대립의 희생양, 분단국이 되었다. 동서의 대립을 극복하지 못하여 낭패를 보았다는 것은 전통의 단절과 그로 인한 정체성의 혼돈에 빠져들었다는 이야기와 겹친다.

 

이런 동서, 남북, 고금의 대립은 다시 하위의 괴리를 낳았다. 지역 갈등, 세대 갈등, 계급 갈등(양극화) 등이 그것이다.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돌아 보건데 이런 크고 작은 모순과 갈등이 도처에 편재하면서 끊임없이 정치, 경제, 사회적 긴장과 불안을 일으켜 왔다. 무엇인가 시원하게 통하고 조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막혀 있고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며 여러 가지 형태의 폭력이 난무해 온 것이다.

 

그러나 주역은 이상한 책이다. 여기서는 조화 속에 부조화가, 부조화 속에 조화가 움튼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어떠한 형국에도 그 형국을 뒤집는 모순이 자라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 주역의 논리적 특성이다. 이 점에서 주역의 논리는 헤겔의 변증법적 논리와 유사하다. 여기서는 꽉 찬 것은 아직 차지 않은 것보다 낮게 평가된다. 완성은 상승의 끝이자 하강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주역의 전문가들은 미제 속에 기제가 있고 기제 속에 미제가 있다고 한다. 여기서 미제는 앞에서 언급한 화수미제 괘를 뜻하고, 기제는 수화기제(水火旣濟) 괘를 말한다. 기제란 이미 물을 건넜음을 뜻한다. 이것은 물(010)이 위에 있고 불(101)이 아래 놓여 이루어지는 괘(010101)로서 주역 68괘중 유일하게 6효 모두 음양의 순서에 맞게 자리한 괘이다. 모든 것을 그 세부에 이르기까지 다 이루었으며 모든 것이 제자리에 놓여있는 형상이다. 주역의 저자는 이런 완성의 형상에 초길종란(初吉終亂)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처음에는 잘 나가지만 나중에는 어려워진다는 것이고, 종국에는 미제 괘가 상징하는 혼란으로 접어든다는 것이다. 반면 미제 괘는 신변물거방(愼辨物居方), 다시 말해서 사물을 진지하게 변별하고 합당한 위치에 다시 배정해야할 필연성을 암시한다. 이런 필연성에 부응한다는 것은 새로운 질서를 창조한다는 것과 같다.

 

주역의 64괘는 하늘이 두 번 겹친 중천건(重天乾) 괘와 땅이 두 번 겹치는 중지곤(重地坤) 괘에서 시작하여 기제 괘와 미제 괘로 마친다. 주역은 미제 괘를 맨 마지막에 놓아 또 다른 시작을 요구하면서 대미를 장식한다. 그 요구에 부응한다는 것은 하늘과 땅을 새롭게 연다는 의미를 지닌다. 천지창조에 버금가는 패러다임의 변화, 그것이 미제 괘가 암시하는 전도의 필연성이다.

 

이런 전도는 하늘-땅(111000)의 순서로 기록되는 천지비(天地否) 괘의 전도로 이어질 것이다. 이 괘를 뒤집어서 땅-하늘(000111)의 순서로 기록하면 지천태(地天泰) 괘가 된다. 아래에서부터 상승하는 땅의 기운과 위에서부터 하강하는 하늘의 기운이 서로 어울려 시너지 효과를 낳는 형상이고, 태평성세를 의미한다. 태극기는 부조화와 모순의 편재를 상징하는 형상을 담고 있는 동시에 새로운 구도의 질서를 창조하고 평화로운 번영을 설계하라는 요구를 담고 있다. 이는 어떤 중대한 패러다임의 전도가 한반도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예언일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이 여전히 객담 상의 필연성이자 논리이지만, 이러한 예언을 실현한다는 것은 우리나라가 격고 있는 주된 모순들을 해소하는 과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의 운명을 규정해온 동서, 남북, 고금의 대립을 새로운 종합의 동기로 반전시킬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 것이 아닐까. 그런 역량을 키우고 증명할 수 있을 때야 비로소 태극기 속에서 들리는 즐거운 예언이 비로소 예언다워 지는 것이 아닐까. 내가 첨단의 서양 철학을 뒤쫓아 가는 틈틈이 3000년 전의 문건인 주역을 읽기 시작한 것도 이런 물음을 아예 무시할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다.

 

 

 

 

 

 

 

 

김상환 서울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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