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북한 인권정책, 목표와 전략은 무엇인가? – 김병로 HK교수
북한 인권정책, 목표와 전략은 무엇인가?
김병로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HK교수
20년 전의 일이다. 영국의 하원의원을 지낸 정치가로 퇴임후에도 ‘유럽연합-북한 인권대화’에 적극 참여하여 북한인권개선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데이비드 알톤 경(Lord David Alton)을 폴란드 인권대회에서 만난 적이 있다. 점심식사 자리에서 그는 두텁게 작성된 ‘EU-북한 인권대화 보고서’를 내게 보여주며 보고서를 한참 뒤적이더니 거의 맨 뒤쪽 페이지에 이르러 한 줄을 가리켰다. 북한에서 행방불명된 김동식, 안승운 두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 두 사람의 생사여부와 행방을 주영 북한대사관을 통해 알려달라고 북한정부에 요구했다는 것이다.
눈이 번쩍 뜨였다. 아! 유럽이 북한과 인권대화를 이렇게 했구나, 이것이 유럽사람들이 인권을 바라보는 시각이구나 하는 현장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정치 대화와 인도주의 지원문제 등 현안들로 많은 페이지를 할애한 후 맨 뒤에 몇 줄 안되는 관심사항으로 자신들이 진짜 목표로 하는 바를 구체적으로 협의하는 인권전략가의 노회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체제와 제도의 변화를 논하면서도 구체적인 사람의 생명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은 알톤 경의 이야기를 들으며 큰 감명과 도전을 받았다.
인권정책이 실질적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정책의 목표설정과 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전략구상이 매우 중요하다. 인권정책의 목표는 사람이나 제도 둘 중의 하나에 두는 것이 보통이다. 즉 유린당하는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거나, 억압적이고 차별적인 제도를 개선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런 기준에서 보면 북한인권 실상을 국제사회에 알리겠다는 현 정부의 북한 인권정책은 목표가 너무 광범위하고 실행전략도 모호하다. 북한의 열악한 인권실태를 폭로하고 압박수위를 높이겠다는 의지 외에 달성하려는 목표가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고 전략도 보이지 않는다.
사실 우리 국민의 북한 피로감은 대단히 높고 북한인권에 대해서도 으레 그러려니 하고 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 인권정책은 공론화를 넘어 실질적인 인권개선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려면 가장 먼저 긴급하게 보호해야 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적시할 필요가 있다. 과거 장성택 부장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던 엘벡 도르지 몽골 대통령이 그랬듯이, 보호해야 할 사람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명시해야 한다. 장성택과 함께 체포된 사람들 중 보호해야 할 사람들이 있을 터인데 그러한 명단을 구체적으로 밝힐 필요도 있다. 물론 특정인의 이름을 거명함으로써 그 사람의 생명을 더 위태롭게 할 우려도 없지 않으나, 그 정도의 구체적 정황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규범적이고 당위적 인권 논의만으로는 정책 효용성을 기대할 수 없다.
또한 제도에 초점을 맞출 때에는 억압적이고 차별적인 제도가 무엇인지 밝히고 어떻게 개선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적시해야 한다. 현행 대북 인권정책은 북한의 체제 전체를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을 가정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러한 당위적이고 규범적인 주장은 정책이 되기 어렵다. 가장 우선적으로 개선해야 하는 제도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어떻게 개선해야 하는지 전략도 담아야 한다. 정부의 주장대로 납북자, 억류자, 미송환 국군포로 문제가 중요하다면 단순히 촉구하는 수준에 그치지 말고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여 해결할 것인가 하는 전략을 준비해야 한다.
과거 유럽의 헬싱키 프로세스는 이러한 목표와 전략을 담은 인권협상의 전형적인 모델로 간주된다. 이념대결이 치열하던 냉전시기 서유럽은 동유럽과의 인권협상 과정에서 전반적인 ‘인권’(human rights) 문제로부터 ‘인적 접촉’(human contact) 사안을 분리하여, ‘인적 접촉’ 사안을 먼저 해결하고, 관계의 폭을 넓힌 후에 인권문제 협상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인권문제를 안보 및 경제협력과 연계하여 협의해 나감으로써 인권개선을 이끌어 내는데 성공하였다.
우리의 경우에도 일단 ‘인적 접촉’ 사안에 해당하는 이산가족과 납북자, 국군포로 등의 이슈들을 북한내부 인권문제와 분리하여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인적 접촉’ 사안은 북한의 인권문제가 아니라 우리 국민과 관계되는 사실상 남한의 인권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산가족과 납북자, 국군포로의 가족 상봉과 정례방문, 해외여행과 재결합 허용을 목표로 구체적인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폭로와 비난만으로는 실행하기 어려우며 안보대화와 경제협력을 병행해야만 가능하다. 국민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을 인권정책의 목표로 둔다면, 소모적인 비난과 정치논쟁보다 목표달성을 위한 보다 실질적인 전략에 심혈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김병로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HK교수